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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영화 리뷰/2012년

아리랑12권 작가 후기 <에필로그> (~48)

 

아리랑 조정래출처 : 조정래 작가 공식 홈페이지 http://www.jojungrae.com

드디어 아리랑 12권을 다 읽었습니다.

본래 매권마다 리뷰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시골에 내려가면서 맥이 끊켜버렸네요.

그래서 그냥 마지막권 리뷰로 아리랑 후기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ps_ 새삼 원고지 2만장을 쓰신. 조정래 작가님이 존경스러워집니다.

아리랑 조정래 작가

아리랑 12권 에필로그

아래는 아리랑 12권 마지막의 에필로그를 부분적으로 가져온 내용입니다.

읽어보시면 아리랑을 어떻게 그리고 왜 쓰셧는지 알게 됩니다. 참고하세요!

다 깨어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을 알 리 알까 하노라

이것은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육당 최남선의 <깨진 벼루의 명>이라는 시조였다.

국어 선생은 쓰게 웃으며 <친일을 안할 수 없었던 입장을 쓴 거다> 이 한마디로 지나쳐갔다. 그때 한번 읽고 지나갔고, 그후에 그 어떤 시험에도 문제로 나온 바 없는 그 시조를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건 그 시조에 대해 내가 품었던 분노 때문이었다.

나의 분노는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첫째는 친일 한 자가 어찌 이렇게 뻔뻔스런 변명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어떻게 이런 시조가 교가서에 실릴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꽤나 긴 세월이 지난 뒤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건 친일파들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속속들이 장악한 현실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조는 교육 분야를 장악한 현실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조는 교육 분야를 장악한 친일파들이 교과서를 통해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함과 동시에 후대들을 최면시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또한 상황불가피론을 주입시켜 자기들의 편을 만들려는 주도면밀한 음모로 취해진 일이었다.

다시 최남선의 시조를 읽어보라. 그 시조 아닌 시조에 친일파들이 눈 하나 깜작 하지 않고 내세우는 <상황불가피론>과 <책임회피> <책임전가> 가 얼마나 충실하고 뻔뻔하고 교묘하게 잘 나타나고 있는가. 이것은 바로 60년대를 풍미하고, 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친일파들의 자기 변호를 넘어선 역습논리인 <그때 조금씩이라도 친일 안한 놈이 어디 있냐>,<네가 그때 살았으면 별수있었을 것 같으냐>, <너는 뭐가 잘났다고 그러느냐> , <이제와서 친일이고 뭐고 따지는건 다 촌놈들 짓이야> 이런 언행들이 횡행하게 만든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나는 최남선으로 대표되는 반역의 역사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안은 채 대학생이 되었다. 문학에 일생을 걸기로 하고 대학에 가서 깨달은 것은 <대학은 문학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다>는 단 한가지 사실 뿐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대한 의문도 < 나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나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면서 친일파의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나는 70년대에 선배들은 물론이고 같은 세대에게도 <촌놈>이라는 비웃음을 곧잘 당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태도를 오히려 속으로 강화해가면서 식민지시대를 꼭 소설로 써야 한다는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한 새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라서 취직이 안되고, 일제의 고등계 형사질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자들이 새 나라의 경찰로 둔갑해서 똑같은 지하실에서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연구를 하던 젊은 학자가 사회진출이 완전 차단되어 버린 사실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가면서 나는 끝없이 괴로워했고 아픔을 겪었고 밤잠을 설쳤다. 그러면서 반역의 역사에 대한 나의 분노는 이성화되었고, 증오는 논리화되어 갔다. 그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욕구와 열정으로 변모했다.

<태백산맥>을 쓸 때도 그랬지만 <아리랑>을 쓸때도 <그렇게 줄기차게 원고를 써낼 열정이 어디서 나오느냐><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하는 물음을 더러 받고는 했다. 나는 그때마다 긴 세월에 걸쳐서 내 가슴속에 차돌멩이처럼 응결되어 온 그런 과정을 다 이야기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웃었을 뿐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아리랑>을 시작하면서 나 자신의 의지를 어느 부분 믿을 수가 없어서 써붙인 글이 있다.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여만! 2백자 원고지 2만 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이건 <아리랑 집필계획>이란 종이 아랫부분에 빨간색으로 쓴 나 자신에 대한 경고문이었다.

나는 <아리랑> 을 쓰면서, 쓰는 일 자체에서 오는 지겨움과 괴로움에 부딪칠 때마다 그 시대를 처절한 고통 속에서 위대하게 싸우다 죽어간 많은 분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나를 추스르고는 했다.

지구를 세 바퀴 이상 돈 발길

나는 <아리랑>을 왜 쓰며,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부 가 바뀔때마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 대충 밝혔다. 그건 한마디로 죽이면 분단대립으로 반토막나고, 또 친일파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차단 시키고 망각을 조장한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구체적이며 총체적으로 바로 알고, 우리 모두가 식민지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굴복감과 패배감, 수치심을 진실한 역사 사실들을 통해 우리의 식민지시대는 저항과 투쟁과 승리의 역사였음을 확인시키고, 우리 모두에게 상실되어 있는 민족적 긍지감과 자긍심, 자존심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작업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많은 취재여행을 해야했다. 왜냐하면 식민지가 되면서 우리 민족은 세계 여러 지역으로 유랑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총체화하는 소설에서 그 유랑의 삶들을 포괄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일과 함께 <아리랑>에서 최초로 시도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유랑의 삶터를 찾아 세계 여러 곳을 다녔다. 중국 2번, 미국 3번, 동남아시아 3번, 러시아 2번, 일본 3번.

이 취재여행의 거리를 전부 이어놓으면 지구를 세 바퀴 이상 돈 것이 될 것이다. 그 지역들은 모두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아리랑은 그 무대가 제일 넓은 소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취재여행들을 통해서 두번 세번 계속 확인하게 된 것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었다. 하와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만주에서도, 연해주에서도 조선족의 근면성과 성실성 그리고 자주성은 객관적으로 인정 받고 있었고, 현지의 동포들 또한 그런 점들에 대한 긍지감과 자존심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동포들을 보면서 정작 모국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많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가 횡행하고 정부마저 <총체적 부정>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사회. 우리에게 민족적 긍지감과 자존심은 얼마나 있는가를 자꾸 되묻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부정적일 수록 아리랑을 써야 할 이유는 더 분명해졌다.

<총체적 부정>의 실체는 최근 2년 동안에 2개월 간격으로 계속 일어난 대형사고로써 너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런 비극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리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더 문제다. 오늘의 이 수치스럽고 끔직한 비극은 우리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어제의 삶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체질화되어 있는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

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은 돈이 절대권능을 발휘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천민자본주의가 주범이라고 진단했다. 일정 부분 맍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횡행한 이 사회의 40년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들이 누구인가?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파렴치한의 표본이 아닌가. 그들이 저 대통령에서 부터 사회 구석구석의 기득권을 장악한 채 40년을 지배한 이땅에 어찌 정의가 있고 양심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천민자본주의도 바로 그자들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아리랑을 통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도 소상히 쓰려고 노력했고, 그들이 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이제 우리는 해방 50주년을 맞았다. 이 시점을 계기로 우리가 해야 될 두 가지 중대한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민족통일에 대한 남북의 진정하고 진실된 태도 확립이다. 둘째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만연시킴 사회적 병폐를 일솟기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반민족행위자 특별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 말에 나를 시대착오적인 미친놈이라고 비웃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근거는 우리와 똑같은 비극을 겪은 이스라엘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라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영원히 처단하는 단호성을 보이고 있다. 그 단호성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배운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작가로서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 때문에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로서 아리랑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