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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영화 리뷰/2012년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2 [달콤한 맛] (51)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2 [달콤한 맛] (51)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2 [달콤한 맛]


[책의 마중물]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내 아이에게 철학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한 청소년기의 딸아이를 둔 아빠로서,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내 아이에게 철학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왔습니다. (중략) 하늘의 별들을 연결시켜 별자리를 그려 보고 갈 길을 찾아냈던 옛 선원들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항해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졌어요. 나는 그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책을 섰습니다. _ 철학통조림을 만들며


[저자 소개]

청소년을 위한 책을 쓴 저자 김용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서울 한가운데이지만 꽃나무, 과일나무들로 둘러싸인 벽돌집에서 궁금한 것이 유난히 많은 딸,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지식 소설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공저)를 썻고, 영화를 철학과 신학으로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등을 펴냈다.


[저자의 주장, 의도 및 목적]

청소년들에게 철학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저자는 청소년들에게 철학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첨단 전자기기와 최신 정보 시스템을 사용하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깜깜한 어둠'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 너무나 많은 불빛들이 만들어 낸 '하얀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갈 길을 잃은 청소년들은 넘쳐나지만 단편적인 전문 지식들, 다양하지만 치우친 관점과 가치들, 감각적이지만 폭력적이기도 한 대중문화들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저자는 이런 청소년들이 나침판도 없이 밤바다를 항해하는 것같이 위험하게만 보인다고 걱정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청소년들에게 '철학하기'란 나침판을 주려고 한다.


[주제문 및 요점]

물음표와 느낌표를 자꾸만 주고받으면서 잘못된 상식을 깨뜨리는 일,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어떤 상식적인 것을 의심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과 응답을 주고받는 일, 그러니까 물음표와 느낌표를 자꾸만 주고받으면서 잘못된 상식을 깨뜨리는 일,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한다. 특히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1,2'에선 약속을 지겨야 하는 이유, 거짓말이 나쁜지에 대한 이유, 이기주의, 이타주의, 공리주의,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해서(이상1권), 끝이 좋으면 다 좋은가(실용주의), 삶의 의미와 사랑에 대하여(실존 주의), 쾌락주의와, 행복에 관한 급진적 구성주의(이상2권)에 대하여 꼼꼼히 따져본다.


[주요 내용]

7. 끝이 좋으면 다 좋은가 : 실용주의는 위험한가? (아우구스티누스, 존 듀이)

이 장에선 실용주의의 위험성에 대하여 철학한다. 문제는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의 결말이 좋은 일이냐는 것인데, 결국엔 '과정이냐, 결과냐'의 문제를 다룬 실용주의의 철학에 관한 문제이다. (※ 실용주의는 19세기 말에 미국의 찰스 샌더스 피어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등에 의해 주장되었던 순수한 미국 사상이다.) 실용주의는 좋은 결과를 낳는 '유용한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상인데 이것엔 문제점이 있다. 바로 윤리학적 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학적 주의는 간단히 '윤리적 상대주의'라고 하는데 이 입장을 따르면, 어떤 행위가 옳다고 하는 것은 단지 '어느 특정 사회나 환경에서 옳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어떠한 비도덕한 행위도 허용될 수 있다. 프린스턴 대학 교수인 길버트 하만의 말을 빌리자면, "히틀러에게는 유대인 학살을 못하게 할 이유가 없으며, 식인 종에게는 포로로 잡은 사람을 먹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다."라는 거다. 왜냐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노인가 바다의 주인공의 결말에 대해 말하자면 이렇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노인은 고기를 잡는것이 목표가 아니라 잡는 행위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단하기에 따라 도덕적 판단이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이 쓴 '국가'란 책에 있는 기게스의 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제는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도덕을 지키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가끔 부정행위를 하는것이 좋을까 인데,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도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윤리학 적으론 '궁국적 물음'이라고 한다. 여기에 이유와 답은 없다. 도덕을 지키냐 아니면 말아야 하는 길에 놓여 있는 우리는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린 "시간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길을 정해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고백록'에서 우리가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과 (크로노스) 마음으로 잴 수 있는 인간적 시간을 구분했다(카이로스). 즉 크로노스에선 과거와 미래가 없고 현재만이 있지만 카이로스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인간의 마음에 공존하기 때문에 우리가 카이로스적 시간 속에 살아간다면, 다시 말해 모든 과거가 기억으로 현재 안에 있고 모든 미래도 기대로서 항상 현재 안에 있다면, 우리는 부정행위를 결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잠깐 부정행위를 한 일 때문에 평생이 부끄러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이로스적 시간 속에 살아간는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결정을 스스로 해야한다.

8.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실존주의 1 (알베르트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마르틴 하이데거)

이 장에선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그대로 우리가 왜 사는지에 관해 철학한다. 참고 문헌으론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와 카뮈의 '페스트' 또 그리스 신화의 언덕위에 돌을 올려놓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의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사르트르가 말한 '앙가주망'을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말로 바꾸면 구속, 속박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를 사회에 속박 시키라는 뜻이다.(사회 참여) 이는 좀 더 넓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회에 참여하여 삶의 의미를 찾는 방식은 개개인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에다 자신을 잡아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에든 스스로 자신을 잡아매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가 보다 삶의 의미를 찾는데 중요한 것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중 하나로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감"이라는 방법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곧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런 것을 다른 말로 '기획투사'라고 불렀다.

9.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나 : 실존주의 2 (플라톤, 가브리엘 마르셀, 프란츠 카프카)

이 장에선 사랑에 대하여 철학한다. 삶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실존주의라고 하면 사랑이 삶의 이유이다 라고 철학하는 것 또한 실존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자 마르셀은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의 어떠 어떠함 때문에 사랑하는것이 아닌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했다. 이는 애로스의 풍요로움을 갈망하는 사랑과 대조되는데, 대게 마르셀의 말하는 사랑은 가족간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고 애로스의 사랑은 우리가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과 비교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보듯이 가족간의 아가페적 사랑이 무너지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을 통해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사랑은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아니라는 것이 주요 내용인데, 프롬은 많은 사람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유치환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로 끝나는 '행복'이라는 시인데 이 시에서 나타난 것 처럼,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수동적 원칙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라는 능동적 원칙을 따른다.

프롬은 말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 모두가 아가페적 사랑을 한다면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것. 우리는 모두 우리를 위해서 존재에 대한 사랑, 즉 아가페적 사랑을 해야한다.

10, 11. 쾌락적으로 살아도 괞찬은가? 행복은 어떻게 얻나 : 급진적 구성주의 (알랭 등, 생략)

"쾌락적으로 살아도 괞찬은가?"를 철학하면서, 행복은 쾌락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치 있는 일들에 자기를 참여시킴으로 얻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 물질적인 것과 행복은 관계가 없다는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을 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이 쓴 책 '행복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경우, 어떤 사람은 "지금 비가 오고 있다. 지붕 위에서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무수한 작은 도랑들이 재잘대며 흐른다. 공기는 빗물에 씻겨서 한층 산뜻하고 구름은 아름답게 뜯어 놓은 솜을 닮았다."라고 생각하며 행복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사람은 "비는 추수를 망쳐 놓고 온통 흙탕물을 만들어 놓으며 풀밭에도 못 앉게 한다."라고 투덜거릴 수도 있다.

인간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각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어 행복해 하기도, 불행해 하기도 한다. 즉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세계가 만들어 내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책'행복론'엔 이런말이 또 있다.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해 주길 기다리는 왕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된다. (중략) 하지만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중략) 나에게 분명한 것은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가 행복해 지길 원하고 이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행복 만들기'보다는 '불행 만들기'에 얼마나 익숙해 있는지에 대해 설명 했는데 즉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낙관주의적 삶에 살아야 행복해 질 수 있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낙관론자들이 행복하다는 실험결과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관적인 삶, 즉 긍적적으로 살며 비관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나누기]

나에게 철학하는 법을 알려준 책

이번 호는 다른 요약보다 조금 길게, 아니 매우 길게 주요 내용을 정리 해보았다. 그 이유는 바로 책의 내용이 알기 쉬웠기 떄문이다. 위의 내용이 많은 만큼 이 책에서 나는 철학하는 법을 배웠고 철학적 지식을 얻었다. 2장에서 실용주의의 위험성, 삶의 이유를 밝히는 실존주의, 그리고 쾌락주의와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하여 철학해 보았다. 사실 난 마이클 샌델의 저서'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하여 처음으로 윤리학과 철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윤리학과 철학에 입문하게 된 만큼 쉽게, 깊이 그의 철학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은 13~18세 청소년 들을 위하여 쓰인 만큼 나의 철학적 지식을 그 어떤 도서보다 재미있게 알려준 것 같다. 무엇보다 딸과 아버지의 대화 형식으로 내용이 진행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여태까지 읽은 책 중 '소피의 세계'도 매우 좋았지만 뭔가 우리나라 책이 아니라서 그런지 읽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물론 다른 철학 도서를 읽고 나서야 이 도서를 접했기 때문에 더욱 내용이 쉽게 느껴졋을 수도 있겠지만, 책 머릿말 에서 말한 것 처럼 깜깜한 어둠이 아닌 너무나 많은 전문적 지식 속의 하얀 어둠 속에 가두어진 나의 철학이 조금 더 제대로 정리되어진 듯 하다.

그러나 단 하나. 제1권의 4장의 이타주의에 관한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 위에서 이미 파란색 글 씨로 생각을 덧붙여 놓았는데, 저자는 현실에서 '다른 뺨을 내 놓는' 박애주의는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뉘앙스를 주었는데 그 생각에 반대한다. 이유인 즉 성서에 있는 '다른 뺨을 내 놓는' 박애주의도 건전한 박애주의와 어리숙한 박애주의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꼭 똑같이 보복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건전한 박애주의를 사용함으로서 인내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자가 능력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남에게 당하고 또 당하더라도 내 힘만은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남을 위해서 인내하면 그 만한 힘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악이 승리할 일은 없다는 것에 있다. 물론 믿음이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고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신이 죽었다면 이런 힘없는 박애주의는 어리숙한 이타주의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