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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복여행기/흑룡강, 길림, 요녕, 내몽고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 여순(旅顺)감옥 (요녕성 4-3호)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 여순(旅顺)감옥 (요녕성 4-3호)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 여순(旅顺)감옥

 

(요녕성 4-3)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 여순(旅顺)감옥 (요녕성 4-3호)

 

대련에서 여순(旅顺) 찾아가기

 

대련에서 가까운 곳에 여순()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청일전쟁 후 러시아의 조계지로 대군행을 건설하여 러일전쟁 당시 중요한 전략적 장소가 되었다. 전후 일본의 해군기지가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여순에는 일본의 폭정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여순감옥(旅顺监狱 여순형무소)는 한국인의 이목을 끈다. 한국 서대문의 형무소와 같이 일본이 중국의 여러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곳인데 그 중에는 안중근의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안중근의사는 이곳 여순형무소에서 5년동안 투옥생활을 하다가 순국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대련에 밤에 도착한 다음날 다른 여러 여행지를 뒤로하고 여순(旅顺)을 찾기로 했다. 유스호스텔 주인아저씨에게 이곳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을 물어보니 23번 버스를 타고 헤이스지아오(黑石礁) 정류장에 도착, 그곳에서 여순으로 가는 7원짜리 버스티켓을 구입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남산 국제유스호스텔에서 이곳까지는 약 1시간 반정도 걸리는데 난 반나절 여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여순 백옥산(白玉山)에 올라

 

여순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백옥산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10분정도면 쉽게 오를 수 있으보이는 높이의 이 산을 감옥을 찾아가기 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역시나 백옥산은 역시 러일전쟁과 일제시대의 흑 역사가 남겨진 곳이다. 예전의 치욕을 잊지 않자는 취지에서인지 이곳 백옥산은 4성급 관광지로 꼽히고 있다. 정상에 지어진 하얀 탑만 봐도 그렇다. 일본군이 러시아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일본군의 승리와 죽은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표충탑(表忠塔)은 아직도 서있기 때문이다.

▲ 백옥산에서 내려다 본 여순

▲ 저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여순구입니다.

 

여순감옥(旅顺监狱) 찾아가기

 

백옥산(여순 장거리버스정류장)에서 여순감옥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도 도착할 수 있으며 택시를 타도 기본요금 8위안이면 도착 가능하다. 나는 감옥을 가본 후에도 그 뒤에 있는 산에 더 오르려 했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려 가는 건 택시를 타기로 했다. 감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오른쪽 주차장 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입장권 구입을 하는데 안중근의사의 특별전시를 보려면 20위안의 입장료를 추가 구입한다고 하기에 입장권을 하나 더 구입한다.

 

( # 보통 입장권만 사시고 내부에서 잘만 말하면 공짜로 보여주기도 한답니다.)

 

 

여순감옥(旅顺监狱)의 역사

 

여순감옥은 1902년부터 1904년에 지어졌다. 85개의 감방이 있고 2층엔 청기와 사무실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러일전쟁기간 제정러시아 기마부대의 병영 그리고 야전병원이었던 이곳,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자 1907년에는 원래 제정러시아 감옥의 기초에 확장을 더해 85개의 감방을 253개까지 늘리고 원내에 15개의 공장을 만들어 군사용품을 만드는 본격적인 일본제국의 형무소가 되었단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폭발하고 감옥엔 2000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수용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엔 중국인을 비롯해 우리민족들 그리고 여러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여순감옥(旅顺监狱)을 둘러보며

 

여순감옥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예전 한국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갔을 때 느낀 삭막함이 이곳에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공간, 겨우 한줄기만의 햇빛이 들어오는 암울한 장소, 옥에 들어가려면 하루 노동이 끝나고 매번 발가벗어야 하는 치욕을 겪어야 하고 조금만 트집이 잡히면 사정없이 맞아야 했단다. 감옥 전시실에는 우울했던 역사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그 때 사용했던 고문도구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감방을 도는 동안 일제의 폭력에 시달렸을 중국과 조국의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니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지금의 우리는 강해져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던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보았다.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네이버 케스트에서 찾은 독립기념관 자료를 이용합니다.]

 

의사는 10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 2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 3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출처].

안중근의사 관련정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3920

 

 

안중근의사 특별관 후기

 

여순감옥에는 안중근의사를 거사와 그의 순국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실이 만들어져 있다. 중국 땅에도 그의 행동이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게 해준다. 그 안에는 그에 대한 전시와 함께 그가 순국했던 장소가 있었다. 이곳은 매일마다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 관리인은 말했다. 나 역시 여순감옥을 다녀온 후 인터넷에서 안중근의사 관련 글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순국직전 했던 마지막 유언을 되뇌어 읊어본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또한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 주은래)는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중일갑오전쟁 후, 중조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본세기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 안중근의사는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이라는 무서운 불씨가 되기 위해 한 몸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언은 실현이 되었다. 한국은 독립이 되었으며 이전과는 다른 강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아직 조국통일이라는 중요한 숙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문제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다시 그의 유언을 다시 받들어 스스로 분발하고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야 한다. 안중근의사의 여한을 풀기 위해서, 그리고 통일한국이란 이름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안중근의사가 했던 것처럼 우리가 또 하나의 불씨가 되어야 한다.

 

 

동지관산(东鸡冠山)

 

백옥산처럼 역시 러일전쟁에 관련된 유적이다. 여순감옥 바로 북쪽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전쟁 중 사용되었던 산 위의 벙커들과 대포들을 볼 수 있다. 역시 4성급 여행지로 선정된 걸 보면 중국이 얼마나 그 때의 아픈 역사를 감추려 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산 위에선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이 많이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고, 곳곳 바위나 대포에는 이곳에 찾아왔던 여행자들이 옛 일본제국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새긴 낙서들을 찾아보기 쉬웠다.

 

여순에는 위에서 이미 소개한 백옥산(白玉山), 여순감옥(旅顺监狱), 동지관산(东鸡冠山)외에도 일본이 대련을 점령했을 당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여러 장소가 있다. 아래에 관련 정보 링크를 걸어두니 중국어 가능한 분들을 찾아가 보시길

 

링크 : http://baike.baidu.com/view/399354.htm?fromId=133192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 여순(旅顺)감옥 (요녕성 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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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화대학 중어중문과09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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