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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영화 리뷰/2012년

소피의 세계3 - 내가 철학도서에 입문한 이유? (30)

 

내가 철학관련 책을 읽어야겟다고 생각한 이유

책을 읽는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내가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대개 세계문학이다.

최근 읽어본 카뮈의 이방인 야간비행이라던지

아이들도 읽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혹은 작가들의 시나 수필을 읽을때면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웃어야할때 웃지못하고 집중도안되고 읽으면서 책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겠었다.

그래서 나의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기위해서 철학관련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책을읽기 위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시골의사 박경철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검은색 줄로 중요하다는 글을 진하게 해두었다. 글을 읽다보면 철학의 중요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철학을 배우면 어떻게 될지 그리고 또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이들 철학공부 :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이진경의 철학의 모험, 러셀의 서양 철학사

 

필자는 연간 400 회 내외의 강연을 다닌다. 거의 매일 한 두번꼴로 강연이 있는 셈이다. 이에대해 누구는 부럽다고 하고 누구는 힘들겠다고 한다. 부럽다는 사람들은 강연료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힘들겠다는 사람들은 물리적인 고생이 많을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 탓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부러울 것도 없고, 힘든 일도 아니다. 먼저 필자가 하는 강연의 절반 이상은 기업이 아닌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수익면에서는 소위 영양가가 별로 없다. 힘들다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행위가 수직적으로 ‘가르치는’것이라면 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다.

그야말로 강연 한 번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수평적으로 청중의 눈을 마주보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위로와 격려가 된다. 특히 그것이 가능성이 충만한 어린 학생들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스폰지처럼 무엇이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학생들에게 경험과 생각을 들려 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멋지고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강연중에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 나라를 이끄는 이가 되고, 늙어 노쇠한 내 몸을 돌봐 줄 의사나 간호사가 되고, 또 내가 살아가는 집을 고쳐 줄 기술자가 되어서, 내가 미래의 어느시점에 그들을 만났을 때, 그때 내 강연을 기억해 주는 행복한 그림 같은 것이다. 그럴때면 저절로 흥분이 되고 때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할 수록 힘이 나고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는 대개 ‘독서나 글쓰기’에 대한 주제,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자기 계발적 성격의 주제, 혹은 필자의 책을 주제로 한 ‘사랑이나 생명’을 주제로 한 주제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들을 상대로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미래’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야기를 들어준다. 강연을 마치면 그렇게 들어주는 아이들이 예쁘고 때론 고맙기도 하다. 특히 강연이 끝나고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한 명 용기를 내서 먼저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아예 봇물이 터진다. 그게 아이들이다.

질문들은 정말 기발하다. 그럴 때는 좋은 강연자보다 좋은 질문의 힘이 크다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강연 주제는 변질되고 자유로운 토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요즘 아이들이 활기차고 적극적이다. 한동안 질의 응답식 대화가 이어지고, 마무리가 될 즈음에 내가 하는 말은 늘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단 읽기는 읽되 잘 읽으라고 한다. 책은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중에 부실한 부분을 지우고 새로운 지식을 입력하는 ‘메모리 반도체’ 같은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기존의 지식중에 진부한 지식이 지워진다. 그 위에 새로운 지식이 덧입혀 지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사유를 만나고, 지식을 얻게되면 기존의 지식체계에 수정이 가해지고 덧칠되거나 가필 수정이 되기 때문이다.

독서란 그렇게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가진 지식 체계를 계속 바꾸고 수정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측면에서 책읽기란 나를 연마하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책이 아닌 나쁜 책(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은 나를 정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갖추어진 나의 지성에 오물을 덧씌우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다.

진부하지만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철학의 중요성’이다. 철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많지만, 청소년기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사고’, 아니 ‘사유’의 방법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보사회가 되면 서 지식은 점점 세분화되고 깊어졌다. 마치 둥치가 굵은 나무에서 수백의 가지가 드리우듯 지식은 깊어졌지만, 대신 가지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남에게 배우는 공부는 있지만, 스스로 익히는 공부가 사라졌다. 그 결과 ‘통섭’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수 많은 가지들이 결국은 한 갈래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고 합쳐서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통섭’의 사유다. 하지만 ‘통섭’이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령과 역기를 들듯 ‘통섭’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식스팩 근육처럼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자기 자리에서 한발 물러나 그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객관적 사유’라 부를 때, 그 객관화가 잘 이루어진 것을 가리켜 비로소 ‘통섭’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통섭,직관,통찰’을 기르는 가장 좋은 학습이 바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철학은 문자 그대로 사유의 학문이다. 자연과학의 실험실이 약품과 기구에 의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유의 실험실은 머릿속에 있고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실험실은 그가 사용하기에 따라 우주를 창조하기도 하고, 또 세상을 가로지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철학은 그런 사유의 실험실이다. 하지만 철학은 자연과학의 실험처럼 결과를 두고 평 할 수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형이고 때론 실체가 없다.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저 너머에 가상의 존재자를 두고, 그것을 탐구하던 ‘형이상학’에서 부터, 자연에서 과학을 발견하고 그 바탕을 중시하는 ‘유물론’까지 철학은 때로는 구부러지고 때로는 지워지고, 때로는 전복된다. 하지만 그렇게 이른 물길의 끝이 어딘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또 내일의 철학은 오늘의 철학과 다르다. 과학은 앞선 연구자의 업적위에 새로운 연구자가 벽돌을 쌓아 나가는 것이지만 철학은 순식간에 선각자의 사유가 뒤집어지거나, 분열하고 다시 합체되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란 경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철학자의 사유가 누적 될 수록 철학에 접근하는 길은 점점 멀어진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에서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철학은 여정의 학문이다. 철학에의 입문은 그 여정을 공부하는 것이다. 한데 이 여정은 쉽게 발을 들이기가 어렵다. 학교에서는 ‘4 원소’, ‘데카르트’, ‘칸트’의 이름을 가르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길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강의 이름만 왼다고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모레가 되는 이치를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늘 아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철학 입문서를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 필자가 추천하는 책은 대개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이진경의 철학의 모험’,‘버트런트 러셀의 서양 철학사’ 이 세 권이다. 우선 고등학생 정도에서 읽기 쉬운 책이 ‘소피의 세계’다. 이 책은 우화처럼 구성되어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왜 그런 사유가 가능한지를 친절하게 이끌어 간다. 필자가 읽어본 책중에서 학생들에게 추천 할만한 가장 이상적인 철학 입문서다, 즐겁게 읽힌다. 성인들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명저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입문자에게 ‘안동림의 이 한장의 명반’이 손꼽히는것 처럼, 철학 입문에도 이 책이 레퍼런스라고 여겨진다.

그 다음 순서는 ‘철학의 모험’이다. 이 책은 독자로서 자랑스러워해도 좋은 책이고 잘 정돈된 책이다. 여기에는 물론 저자 이진경의 내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수의 일장’은 고요하면서도 무게가 있다. 쉽게 재밌게 풀어가면서도 철학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아주 잘 정돈되어 있다.

이 두 책을 읽었다면 다음 순서는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다. ‘철학사’는 철학 입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 자체가 사유라면, 철학사는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철학사를 건너뛰고 철학을 공부한다면 비약된 의식처럼 허술하고 기괴한 모형이 된다. 왜 당대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철학의 주제가 변주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철학은 왜 등장했는지, 시대별로 연대기를 구성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물길을 보여준다. 그래서 철학사는 물에 손을 담그는 책은 아닐지언정, 물길을 보여주는 ‘부감도'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세 권의 책을 모두 읽으면 청소년기의 철학공부로서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그 다음부터는 좀더 세분화해서 읽고 싶은 철학자를 골라 ‘니체’건, ‘헤겔’이건 하나하나 산을 오르면 된다. 그것은 성인기의 몫이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이 세 권의 책은 철학교육, 아니 나아가서는 사유하기, 통섭교육의 제 일순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